 |
| ▲ 양교1리 양다리 | |
양교5리 ‘여수’ 물 맑고 풍광좋은 마을이라는 뜻
산세수려한 오봉산 개발로 몸살앓고 삼봉산으로
■ 쪽다리가 있었던 양교리
양교리는 오성산 자락을 끼고 모두 여섯마을로 이뤄졌다.
가장 큰 마을은 4리 대겸당(겸댕이)지만 1리 원양교(양다리)나, 5리(여술)도 작은 마을은 아니다. 1리는 원양교(양다리) 마을이다.
이 마을 앞에는 작은 저수지를 끼고 폭이 좁은 개울이 흐른다.
전통사회에서는 작은 개울도 통행에 큰 장애가 되었다. 더구나 물이 적으면 모를까 깊고 수량이라도 많으면 징검다리도 놓을 수 없어서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양다리 마을 앞은 오봉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로 수렁논이 많고 개울은 수심이 깊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징검다리를 놓지 못하고 작은 쪽다리를 두 개 놓았다.
특징이 없는 농촌 마을에서 쪽다리는 장승이나 솟대, 선돌처럼지역의 상징처럼 불려졌다.
그래서 만들어진 지명이 양다리(梁橋)다.
이 마을은 전주 이씨 능원대군파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19대 선조부터 살았다고 하니 마을의 내력도 5, 6백년은 족히 된다.
동족마을이긴 하지만 규모는 31호에 불과하다.
마을 주민 이순헌(69세)씨와 이기량(61세)씨에 따르면 몇 십 년 전만해도 40호가 넘었지만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은 병들어 죽으면서 가호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옛부터 양반촌으로 이름났다.
그래서 신리나 창내리, 교포리 사람들은 ‘산쪽 양반들’이라고 불렀다. 양다리 사람들은 스스로 조선시대 왕족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 한다.
조상들의 시제를 위해 릉(陵)이 있는 경기도 광주나 남양주까지 다녀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식들 교육을 잘 시켜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려는 노력도 게을리 않는다.
70살이 넘는 사람들 중에 해방 직후 서울대를 졸업한 사람이 서너 명이나 되고, 현재 박사가 3명이나 배출된 것도 그러한 노력의 결과다.
양교 2리 고렴은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래 구래미, 개각뿌리, 태끌이, 삼태평 등으로 불렸다. 고렴이란 지명도 ‘구래미’를 음에 맞춰 한자화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렴마을에는 한(韓)씨와 황(黃)씨가 많이 산다.
두 세 해 전에 만난 이귀순(당시 82세)씨는 자신의 집안이 양반가로 소문났으며, 일제강점기 시집 올 때만 해도 노복들을 거느렸다고 자랑했다.
■ 옛 숙성면의 소재지 대겸당
양교 3리는 신흥동 또는 분가촌이다. 신흥이라는 지명은 보통 새로 생긴 마을에 붙여진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후 피난민들이 만들었다.
평택지방은 평안도나 황해도와 해양으로 가깝고 간석지와 황무지가 많아서 피난민들의 정착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주어진 농경지나 생산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황무지나 간석지를 개간하여 경제기반을 삼았다.
양교리 신흥동의 피난민들은 마을 주변의 저습지를 개간하여 정착한 사람들이다.
황무지의 개간은 고된 노동이었지만 근면한 노력으로 버텨냈다. 결과 현재는 다른 동네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들이 많다.
양교 4리 대겸당은 양교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그래서 겸댕이라고도 부르지만 큰말로도 불린다.
겸댕이, 또는 겸당(兼堂)이라는 지명은 ‘큰당골’의 한자지명으로 마을에 당목(堂木)과 당집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여술에 사는 이용범(51세)씨는 옛날 대겸당에는 무당이 3명이나 있었다고 기억했는데, 이것도 당집이나 당목과 연관되었을 것이다.
평택시사와 같은 역사서에는 “옛부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많았고 권문세가와 예(禮)를 숭상하는 문장가들이 살아서 노복들에게까지 기와집을 지어줬기 때문”에 유래된 지명이라고 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대겸당은 옛 숙성면 소재지이다.
숙성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이 있기 전 옛 수원군에 속했던 행정구역이다.
그러던 것이 1914년 오정면과 합쳐지면서 오성면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행정관서도 숙성리로 통합되었다.
대겸당에는 아직도 옛 면사무소 터가 남아 있다.
내가 몇 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건물을 해체하고 있어서 옛 모습의 일부나마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흔적마저 모호하다.
몇 년 전에 만난 이 마을 주민 정완영(당시 75세)씨와 정주화(당시 70세)씨는 내가 마을의 생성시기를 뭍자 ‘고려 때’ 만들어졌으며, 마을의 대표 성씨는 영일 정씨라고 말했다.
그래서 ‘영일 정씨 중에는 부자도 많았겠네요?’라고 물었더니, 일제 때 살았다는 천석꾼 정낭청이 가장 큰 부자였다고 하였다.
■ 장수가 오봉산을 딛고 백봉산까지 뛰었다고!
양교5리는 여수(麗水=여술)다.
이 마을은 30여 호로 규모가 작다. 하지만 마을 뒤로는 오봉산이 우뚝 서 있고, 집집마다 감나무, 밤나무가 우거져서 여름에는 집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물 맑고 풍광 좋은 마을이라는 뜻’의 여수(麗水=여술)다.
여수(麗水=여술)라는 지명은 양다리나 구래미에 비해서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
인위적이라는 것은 지배층이 살았던 마을이거나 식자(識者)층이 거주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마을 주변에는 지배층과 관련된 설화나 전설이 많다.
대겸당에서 여수(술)로 넘어 가는 고개는 ‘문장자 고개’다. 이 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때 여수와 대겸당에는 기와집이 3백 호나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부자는 문장자였다. 마음씨 좋은 부자는 가난한 자들의 언덕이어서 이 집에는 배고픈 걸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마음씨 좋은 문장자도 나중에는 지겹고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어느날 스님 한 분이 이 집에 시주를 청하였다.
그러자 문장자는 걸인들 때문에 귀찮아 죽겠는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여수(술) 쪽에 있는 산혈을 자르고 내(川)를 방울미 앞으로 돌리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였더니 몇 년 못가서 문장자 집은 망하였다.(정완영씨 구술)” 이 이야기에는 불교적 색채가 진하게 난다.
나눔에 인색한 부자는 화를 입어 망한다는 이야기 구조는 불교의 ‘자비’나 ‘공(空)’ 사상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양교리에는 이 이야기 외에도 ‘삼정승재’라든가 ’장수바위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삼정승재’는 마을 서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 세 개이다.
이 봉우리는 평택시 칠원동의 ‘이괄의 절터’에서 보면 3명의 정승이 무릎 꿇고 절하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실패한 반란은 많은 뒷 말을 남기지만, 이괄의 난 당시 인조반정과 서인정권에 대한 민심의 동향을 읽을 수 있는 전설이어서 눈길을 끈다.
오봉산은 평택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산세도 수려하고 적당히 높아서 한 고을이 자리잡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평택 북부지방에서는 무봉산과 덕암산을 배경으로 반촌(班村)이 형성되었듯이, 서부지역은 오봉산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현재의 오봉산은 개발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본래 봉우리가 다섯 개여서 오봉산이라고 했는데 공장이 들어서면서 두 개가 없어져서 ‘삼봉산’이 되었고, 오래 전에 흑연광산을 개발한다고 온 산을 들쑤셔서 성한 곳이 없게 만들었다.
여술마을의 이용범(51세)씨는 평야가 많은 평택에서 오봉산과 같은 명산은 지키고 보호해야하는데 생각없고 부패한 공무원들이 허가를 남발해서 이모양이 되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오봉산에는 장수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장수의 발자국이 움푹 패어 있는데, 이 발자국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무예를 닦던 장수가 오봉산에 한 발을 딛고 백봉산까지 펄쩍 뛰어 가면서 남긴 것이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양교4리 대겸당 마을의 공동육아협동조합 느티나무 어린이집을 방문하였다.
마당에서는 할머니 한 분과 젊은 남자 분이 큰 통에 황토 앙금을 받아 놓고 황토염색을 준비중이었다.
거실로 들어섰더니 이제 갖 1달이 지난 아기가 배냇요 위에서 뒹굴거리고 적당히 어질러진 거실과 아이들 눈 높이에 맞춘 정원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느티나무 어린이집은 경쟁보다 나눔과 섬김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11명의 부모들에 의해 2000년에 개원한 공동체다.
공동육아협동조합이므로 필요한 기금은 부모들의 출자로 충당하였고, 교육내용도 관계학습과 나들이 체험학습을 위주로 하였다.
박현숙 원장은 느티나무 어린이집의 교육을 대화와 나눔을 통한 이야기 문화 창출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물 사이의 올바른 관계 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평택으로 가장 필요한 돌아오는 길에 ‘나눔과 관계’라는 단어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화와 나눔을 통한 올바른 관계형성,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가져야할 덕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명이야기 designtimesp=2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