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김해규
2007/6/4(월)
마을과 지명이야기-오성면 양교리(2)  

오성면 양교리 -두 번째 이야기

1.양교리에 봄이 왔다
양교리를 다시 찾았다. 이번 답사는 지난번 조사 때 소홀히 하였던 겸댕이와 여술마을 조사가 목적이었다. 초입에서 마을 사정에 밝은 정완영(80)씨와 한상복(75)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대겸당이라고도 하는 양교4리 겸댕이는 30여 호의 아담한 마을이다. 성씨(姓氏) 연일 정씨가 대성(大姓)으로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정완영씨에 따르면 입향조는 9대조인 덕원공이라고 하였다. 겸댕이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이전 수원군 숙성면의 면소재지였다. 그래서 마을 안에 면사무소 건물도 있었는데 불행히도 6, 7년 전 철거되어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양교5리 여술도 30여 호쯤 된다. 이 마을은 청주 한씨와 수성 최씨가 대성(大姓)이다. 한상복(75)씨에 따르면 청주 한씨는 입향조 한오유가 반월에서 이거(移居)한 뒤 6대 200여 년을 살았으며, 수성 최씨는 최영 장군의 후손들로 10대를 거주하였다고 하였다. 마을은 청북면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도 크게 번성하였고 과객(科客)들의 왕래도 빈번하였다. 그러다가 근대로 오면서 농경지가 저지대로 확산되자 마을이 쇠락하였다.
 산과 골짜기가 많은 양교리의 지명은 매우 다채로웠다. 오봉산은 오성면 일대의 주산(主山)으로 올망졸망한 봉우리가 다섯 개가 있어 유래되었다. 그러다가 197, 80년대 흑연광산의 원료 채취가 시작되면서 봉우리 두 개가 사라져 이제는 삼봉산(三峰山)이 되었다. 삼정승산은 새터 서쪽에 있다. 이 산은 고덕면 여염리에 있는 이괄 아버지의 묘를 향해 무릎 꿇고 절을 하는 모양이라고 알려졌다. 주민들을 이것을 이괄에게 삼정승이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난(亂)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동향을 이해할 수 있어 주목된다. 새터 뒷산은 두루미의 형국이라고 하여 두드림 또는 도드림이라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두루봉이라고도 부르는데, 두드림과 두루미가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드림 옆 봉우리는 삿갓모양이어서 삿갓봉이고, 오봉산 옆에는 거문고소리가 난다는 개똥산이 있다. 개똥산에서 거문고 소리가 어떻게 나느냐고 물었더니 주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골짜기 이름으로는 새터에 탑골, 봉너머, 승적골, 복새미, 송(성)골과 같은 지명이 있고, 오봉산 아래에는 움멍골이 있다. 탑골, 승적골 같은 지명은 불교와 관련 있어 한상복(75)씨에게 물었더니 예부터 새터 마을에 절터라고 알려진 곳이 있다고 하였다. 송(성)골은 성곽과 관련이 있으며 봉너머는 고개와 관련된 지명이다. 또한 한수골 과 삼태골은 양교3리 신흥동에 있는 지명이고, 신사례와 갓골은 겸댕이에서 동북쪽으로 길게 올라가는 골짜기다. 이처럼 지명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고 민중들의 삶이 묻어 있다.      

2. 헛물바지의 땅에 모를 심고 통곡했던 민중들
해방 전후 양교리는 논과 밭이 반반이었다. 산 아래에는 밭이 많고 골짜기에는 논이 많았다. 하지만 산 아래 밭이나 들판의 논은 척박한데다 비만 오면 수렁으로 변하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논 1마지기를 농사지어도 쌀 5, 6말에 불과하였고, 들판의 논들은 비만 내리면 시뻘건 황톳물에 뒤 덮이기 일쑤였다. 그런 땅을 ‘헛물바지’라고 하였다.
농민들은 헛물바지의 땅마저 주인이 되지 못했다. 부자들은 헛물바지 땅 세 마지기와 맞바꾸는 산 쪽 땅 수 백마지기를 소유했지만 가난한 빈농들에게는 작대기 하나 세울만한 땅조차 가지지 못하였다. 일제 말 양교리 일대의 땅은 서울의 일본인 신탁회사와 정낭청의 소유가 많았다. 낭청(郎廳)이란 조선후기 비변사나 선혜청, 5군영에 두었던 6품 이하 당하관(堂下官) 벼슬로 생원(生員), 진사(進士)도 보기 힘들었던 시골동네에서는 대단한 권위를 가졌다. 정낭청의 집은 겸댕이에 있었고 천석꾼 수준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댁의 토지는 숙성리에 살았던 서의관이 마름을 봤다. 조선시대에 ‘의관’이란 벼슬은 의원을 말하기도 하고 1895년 이후에는 중추원의 의원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는데, 서의관은 중추원 의원은 아니었고 의업(醫業)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업을 했지만 서의관은 힘이 장사였다. 정낭청이 서의관을 마름으로 채용한 것도 창내리 앞 안성천을 쌀 두 가마니 지고 건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였다고 한다. 서의관은 마름을 보면서 타작감독이나 소작료도 본인이 징수하였다. 그러다보니 소작인들은 소작권을 떼일까봐 늘 전전긍긍하였다. 술대접은 기본이고 일부 소작인들은 명절에도 구경하기 힘든 소갈비나 소고기를 바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위풍당당하던 정낭청과 서의관의 위세도 일제 말 정낭청 집안이 몰락하면서 무너져 내렸다. 정낭청 집안의 몰락처럼 신탁회사의 땅도 농지개혁을 하면서 농민에게 돌아갔다. 이 땅은 본래 박판서의 소유였다가 일제 말 신탁회사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 직후 박판서의 아들 박흥서의 며느리가 소유권을 가져갔는데 얼마 후 농지개혁을 하면서 얻은 땅을 다시 내줘야 했다고 한다.

3.해방되자 오봉산에 세 번 올라 춤을 추었다는 한영수
독립운동가 한영수(1893~1948(?)는 양교리 여술마을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지만 의협심과 민족의식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27세의 청년 한영수는 평택역전에서 쌀장수를 하는 이도상과 목준상, 합정동의 심현섭 등으로부터 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민족의 독립운동에 자신이 뒤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도상 등과 3월 11일 평택역전 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가 총칼로 진압한 이날 시위에서 한영수는 동료 13명과 함께 잡혀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상복(75)씨는 한영수와 사종(四宗) 간이었다. 그는 어릴 적 한영수를 가까이서 보아왔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한영수는 평택역전의 만세운동 외에도 양교리에서도 만세를 주도했다고 한다. 그 때 여술에서 양교리 입구에 이르는 큰 길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 백봉리에 있던 주재소 순사들도 위세에 눌려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한영수에게는 3.1운동 때 입은 흉터가 목에 있었다. 그 흉터는 경찰서에서 순사들이 칼을 들이대며 포섭하려들자 얼굴에 침을 뱉어 저항하다가 생긴 것이라고 한다.
3.1운동 뒤 한영수는 고향마을에 칩거하여 글 읽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살았다. 다른 일을 하려고 해도 일제의 감시가 워낙 심해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한 한영수는 오봉산에 세 번이나 올라 춤을 추었다고 전한다. 그것은 뜻을 굽히지 않고 오랜 인고의 세월을 보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었을 것이다.  
양교리의 인물로는 한영수 외에도 양교리 강습소를 세워 후진양성에 노력한 황로식을 꼽을 수 있다. 황로식은 동생 황노철, 아들 황욱재와 양교리 경로당 부근에 양교리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0여 세에 양교리강습소를 다녔다는 최승돈(80), 곽영철(75)씨에 따르면 강습소는 교실 2칸, 교무실 1칸으로 이루어진 세 칸짜리 집이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시험에 탈락했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다녔다. 일제 말에는 황유재씨를 비롯하여 교사가 3명이 가르쳤는데, 숙성리 서일학원처럼 한글교육은 못했고 산수 중에서 주판을 많이 배웠던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해방 직후까지 존속되었던 야학이나 강습소는 정부수립 후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대부분 폐교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교리 강습소도 폐교되어 오성초등학교에 통합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4.풍물가락만 들려도 지팡이 짚고 춤을 추었다는 상쇠 신용휴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한 양교리에는 마을마다 두레가 있었다. 양교리 두레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것은 새터 두레였다. 새터는 구씨가 많이 살았는데 대부분의 땅이 이 집안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다리나 여술, 겸댕이에도 두레가 조직되었다. 그 중에서 형님두레는 양다리 두레였다. 그래서 양다리 두레가 농기를 세우고 일을 하면 다른 마을 두레는 멀찍이 돌아가거나 예를 표했다. 새터와 여술두레는 남자두레와 여자두레로 구분되기도 했다. 한상복(75)씨 말로는 여술이 남자, 새터가 여자였다고 한다. 두레패의 조직은 좌상과 상쇠로 구성되었다. 이 마을도 좌상의 역할은 맏어른으로 일할 순서를 정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일이었고 실질적인 운영은 상쇠를 중심으로 하는 두레패가 하였다. 내가 양교리에는 전설적인 상쇠가 없냐고 물었더니 신흥동의 신용휴씨가 최고였다고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정완영(80)씨에 따르면 신용휴씨는 나이 들어 지팡이 짚고 다닐 때도 어디서 풍물가락만이 들리기만 하면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정도였다고 하였다.
두레는 발달했지만 당제는 모든 마을이 일찍 중단되어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단지 양교2리 고렴 뒷산에 당숲과 당목이 있었다는 말만 들었는데 그것도 오랫동안 섬기지 않아서인지 어느 것이 당목이고 일반 나무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계(契)는 상계나 연반계가 없는 반면 우물계가 발달한 것이 특징이었다. 우물계는 우물의 수리와 관리를 위해 주민들이 조직한 것인데, 마을이 오봉산 아래에 자리 잡았으면서도 물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귀했냐고 물었더니 소화 14년 가뭄(1939) 때는 여술의 물이 말라 새터까지 물 길으러 다닐 정도였다고 하였다. 양교리 여섯 마을 가운데 최고의 우물은 새터 우물이었다. 이 우물은 석간수로 바위를 뚫고 물이 나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고 시원하여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샀다. 우물 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도 있다. 은행나무에는 전해오는 설화가 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채록하지 못했다. 우물과 은행나무는 1970년대 경지정리 때 큰 피해를 봤다. 우물은 메워졌고 은행나무 주변은 경작지로 개간되어 섬 가운데 나무가 있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5)손님접대를 피하기 위해 혈(穴)을 끊었다?
문장자 고개는 오성면 양교5리 여술마을에서 새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려시대 쯤 여술마을은 청북을 거쳐 한양으로 향하는 큰 길이 지났고 마을도 삼백 호가 넘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는 문장자 또는 문정승이라고 불렸던 큰 부자가 살았다. 교여통이 편리한 큰길가의 이름난 부잣집은 과객(科客)과 걸인들의 좋은 안식처였다. 손님접대는 명문가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던 옛날에는 오가는 손님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홀대를 하기라도 한다면 인심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동네방네 소문이 나서 가문의 체통과 위신에 큰 손상을 입었다. 손님접대는 안주인에게 큰 고통을 주기도 하였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3백 년 동안 부와 명예를 누렸던 경주의 최부자집에서도 추수한 곡식을 삼등분 하여 그 중 하나를 손님접대를 위해 남겨 놓았다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름난 가문에서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을 하느라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빈객(接賓客)을 생명처럼 귀히 여겼던 것은 명문가의 입장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골에 사는 선비의 입장에서 손님은 세상 소식을 전해주는 정보창구였으며, 학식 있는 선비들과 교류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또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면 인심을 얻는 이점도 있었다. ‘까짓 거 세상인심 잃으면 어때, 나만 잘 살면 되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농촌에 근거를 두고 사는 양반들에게 인심은 가문의 명예와 위신을 지켜주는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 뒤주를 따로 마련해두었던 전남 구례의 운조루는 선행으로 인심을 얻어 환란(患亂) 때에도 약탈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문가에게 인심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려주는 사례다.
하지만 문장자는 그렇지 않았다. 문장자에게 손님접대는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밥값도 못하는 나그네들 때문에 재산이 축나고 곳간이 텅텅 비는 것이 늘 아까웠다. 그러다보니 오는 손님은 오만상을 쓰며 받아들였고 가는 손님은 소금을 뿌려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스님 한 분이 마을 앞을 지나다 문장자 댁에 시주를 요청했습니다. 범상치 않음을 느낀 문장자는 스님을 극진히 모신 뒤 속내를 털어 놓고 ‘손님들이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새터로 넘어가는 산의 혈(穴)을 자르고 마을 앞 내(川)를 방울미(오성면 죽리) 앞으로 돌리면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마을 앞의 내(川)는 경작지를 옥토로 만들어주고, 우 백호에 해당하는 우측 산맥은 마을을 따뜻하게 감싸준다는 사실을 망각한 문장자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대로 하였다. 그러자 스님의 말씀대로 손님과 걸인들이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발걸음이 뚝 끊어졌다. 나중에는 농사도 안 되고 가세가 기울면서 문장자의 집도 망해버린 것은 물론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정완영(80)씨의 안내로 여술마을 문장자고개를 답사하였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문장자의 무덤은 고갯마루에 버젓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하여 잡풀이 무성했고 일부는 파헤쳐져 있었지만 무덤 앞에는 문인석도 남아 있었고 여말선초의 것으로 보이는 묘표도 땅 속에 묻혀 있었다. 정완영씨 말로는 무덤 뒤의 둥근 봉분들도 전부 문장자 집안의 묘였다고 하였다.
접빈객(接賓客)을 소홀히 하여 집안이 망했다는 문장자, 이제는 돌보는 후손도 없어 외로이 서 있는 작은 묘비는 그날의 진실을 알고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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