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면 숙성리
오성면 숙성리
사방이 확트인 평야의 중심에 자리잡은 숙성리
▲ 숙성3리 소조두


일제 강점기
서일학원은
오성면의 꿈


강습소 세운
서병창씨
좌익 경력으로
집안 풍비박산


■ 여름답사는 고행이다

여름답사는 정말 힘들다.

더운 날씨에 노인정은 고사하고 대문간에 나와 있는 사람조차 만나기 어렵다.

며칠 째 34, 5도를 오르내리는 금요일 오후 5시 더위가 한결 눅어진 틈을 타서 길을 나섰다.

차를 타고 궁안교를 건너 숙성리에 들어섰다.

동네 밖으로 우회도로가 난 뒤로는 오랜만에 방문한 것 같다.

동네 입구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4, 5층 짜리 빌딩이 몇 개 들어선 것을 빼고는 시가지는 변함이 없다.

나는 우선 마을 사진을 찍었다. 마침 맑은 날씨인데다 인터뷰하다 해가 지면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구장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빌딩에 올라 숙성리 시가지 사진을 몇 컷 찍었다.

남쪽으로는 오성들이 펼쳐졌고, 동쪽에는 평택 시가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오성들은 삼복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벼들이 쑥쑥 자란다.

지난 장마에 ‘일조량이 좋아야 벼가 잘 자라는 데 걱정’이라던 똘건너 농민들의 우려가 생각나 오랫동안 들판을 내려다봤다.

시가지를 찍은 뒤 차를 타고 2리 대조두와 3리 소조두, 4리 숙신대를 차례로 찍었다.

숙성리는 오성면의 소재지다.

본래 오성면은 구한말 수원군 숙성면과 진위군 오정면, 언북면 지역이 1914년에 통합되어 만들어진 지명이다.

그래서 지명도 오정면의 ‘오’와 숙성면의 ‘성’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숙성면은 양교리, 숙성리, 안화리, 죽리, 교포리 주교동에 걸쳐 있었다.

이 시절 숙성면의 면소재지는 양교3리 대겸당이었다.

그러다가 주변지역이 통합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성들의 간척과 도로교통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이 마을에는 모두 5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본래는 4개였지만 1리 원숙성 마을이 커지면서 두 마을로 분리되어 현재는 5개 동리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1리, 5리를 합쳐 원숙성이라고 부른다.

원숙성은 ‘잔재’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잔재’는 글자대로 마을 뒤 구릉사이에 야트막한 고개들이 있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이곳은 마을 규모도 2백 호가 넘으며 오성면사무소와 파출소, 오성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몇 년 전까지 5일장까지 있었기 때문에, 정치와 행정, 교육과 경제의 중심지라고 할 만 하다.

2리는 대조두(大潮頭)이다. 대조두는 다른 말로 ‘큰조머리’ 또는 ‘큰밀머리’라고도 부른다.

사실 세 개의 이름은 다 같은 의미로,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올 수 있는 상한선’을 뜻한다.

숙성3리 소조두는 ‘작은조머리’, 또는 ‘작은 밀머리’라고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기록인 “조선전도부군면리동 명칭일람”에 보면 이 마을과 4리 숙신대 마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두 마을이 1914년 이후 형성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4리 숙신대는 오성들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수원새터’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이 지역이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만 해도 직산군(당거리)과 수원군(숙성리)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한 현상은 평택시 유천동에서도 볼 수 있다.

유천동도 새로 난 1번 국도를 경계로 동쪽마을을 양성유천, 서쪽 마을을 본유천 또는 평택유천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 이주민 김교일씨의 일생

답사는 숙성3리 소조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을 입구에 ‘천연 염색마을’이라는 글씨에 이끌려 마을 안쪽으로 들어섰더니 대문간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노인 5, 6명이 눈에 띄었다.

이 더위에 마을 회관에 가봐도 별반 소득이 없을 것 같아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 자리를 잡았다.

나는 마을 답사를 하면 대체로 여성보다는 토박이 남성들과 인터뷰를 시도하는데, 그것은 남성들이 여성보다 마을에서 오래 살았고 바깥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경험과 지식이 앞서서이다.

찾아온 이유를 듣고 인터뷰에 적극 응한 분은 김교일(74)씨와 신태우(72)씨였다.

이야기를 풀어 가다 보니 두 분은 소조두 마을의 토박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토박이가 아니면 어떤가,

이주민에게는 이주민의 이야기가 토착민에게는 토착민의 삶이 서려 있지 않겠는가.

김교일씨는 32년 전 안중에서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이주 동기는 목장하기 위해서였다.

목장을 하기 전에는 UN경찰과 미군부대 근무를 하였다.

그래서 UN경찰이 뭐냐고 했더니 한국전쟁 뒤 창설된 수인특경대를 말한다고 했다.

경찰이 되기 전에는 군대에 있었다.

김교일씨는 적령기 때 전쟁을 맞아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학도병으로 끌려 갔다.

전시였기 때문에 무려 5년 4개월을 복무했고, 죽을 고비도 수 차례 넘기며 신의주까지 올라갔다 왔지만 보직이 헌병대여서 목숨을 부지했고 태극무공훈장까지 받았다.

인터뷰가 거꾸로 진행되는 느낌이었지만 징집되기 전에는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고향이 어디며, 어떻게 자랐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랬더니 자신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며 조부가 마름을 했기 때문에 풍족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하였다.

하지만 조부의 생각이 구식이어서 자신을 초등학교만 졸업시킨 뒤 독선생을 불러 놓고 한학만 가르치길래 17살에 인천으로 도망가서 세무서 과장을 지냈던 가까운 친척의 도움으로 낮엔 수금사원을 하며 밤엔 중학교에 다녔노라고 말했다.

평택에 내려와 처음 정착한 곳은 안중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정착 후 큰 아들이 삼륜차 3대를 가지고 운수업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경험도 부족하고 사업수완도 없었는지 얼마 못가서 망했다.

30여 년 전 숙성리 소조두 마을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들이 나머지 유산으로 목축업을 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소조두 마을의 땅값은 안중보다 헐했기 때문이다.

소 3마리로 시작한 목축업은 아들의 성실한 노력으로 번창하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사고가 터졌다.

아들이 기계를 잘못 조작하다 한쪽 팔이 잘리고 갈비뼈 여섯 대가 으스러지는 큰 사고를 당한 것이다.

아들은 절망과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부모의 가장 큰 고통은 ‘자식을 앞세우는 것이다’고 했던가, 자식의 절망 앞에서 김교일씨의 가슴도 타들어갔다.

아들이 절망에서 헤어나오게 된 것은 친구들의 도움이 아주 컸다.

김교일씨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눈시울이 적셔진다.

다시 힘을 얻은 아들, 불편한 몸으로 마을 이장 일도 하고 다시 한우도 사육한다.

그 일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 오성면의 꿈이 서린 서일학원

서일학원은 1930, 40년대 오성면의 꿈과 희망이었다.

내가 숙성리를 답사하면서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이 바로 1920년대의 오성부인회와 서일학원에 대한 것이었다.

서일학원은 일제강점기 서병창씨가 세운 강습소였다.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한 현실에서 가난한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기란 어려운 노릇이었다.

하지만 서병창씨는 그 일을 해냈다.

서병창씨의 제자들조차 자세히 모르는 내력이지만 들었던 이야기만으로 구성을 하면, 이 분은 외지로 유학을 갔다가 부인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사재를 털어 강습소를 열었던 분으로 생각된다.

민족주의나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중의식 계몽이나 실력양성, 계급의식 각성과 같은 목적도 개입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숙성리는 서씨들이 대성(大姓)이어서 재력이나 사회적 지명도가 높아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학교 터는 숙성1리 오성중학교 뒷편의 연립주택 자리였다고 한다.

이곳에 교실 3칸과 운동장을 만들었다. 학교가 열리자 학생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현 오성초등학교 자리에 2년제 간이학교가 있었지만 학생 수는 서일학원이 많았다.

학비가 쌌던 것도 큰 원인이었다.

교사는 서병창씨와 조선생 그리고 금곡리에 살던 이선생이라는 분이 맡았다.

때론 서병창씨 부인도 수업을 하였다.

교과목은 일반학교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서일학원은 일제 말까지 존속되었다.

하지만 해방 후 어지러운 세상에서 남로당에 가입하였다가 한국전쟁 때는 공산치하의 평택군 책임자까지 지내면서 집안이 풍비박산되었다.

좌익 경력으로 서병창씨 본인도 죽임을 당했지만 살아남은 자녀들도 전쟁이 끝난 후 몇 십 년을 핍박과 설움 속에 살아야했다.

그것은 분단시대 이념을 달리하며 살았던 사람의 가족들이 겪어야했던 엄혹한 현실이었다.

숙성리에는 당제나 두레풍물 등 마을 공동체 문화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남아 있다면 소조두 마을의 당제 정도인데,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마을에서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는 것이 의아할 뿐이었다.

소조두 마을에서 내가 당집과 당제 이야기를 꺼내자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아주머니들이 거들고 나섰다.

당제 경험은 30년 밖에 살지 않은 김교일씨보다 자신들이 더 많이 안다는 것이다.

이 마을 당제는 여느 마을처럼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 좋은 날을 잡아 거행되었다.

그 해?? 흠 없고 정결한 사람을 뽑아 제주를 삼는 것도 동일했고, 날짜가 잡히면 마을 입구부터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다스렸다.

당숲과 당목, 당집 둘레에도 금줄을 쳤다.

제물은 평택지방에서는 돼지를 잡거나 소를 잡아 올렸는데, 이 마을은 소를 잡았다.

하지만 당제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고 마을 공동기금 걷기도 어렵게 되면서 값이 싼 소머리로 바뀌었다.

제를 거행할 때는 무당을 부르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축문을 써서 읽었으며, 한지에 마을 남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서 소지를 올렸다.

옛날에는 제사음식을 똑 같이 나누었으나 지금은 다음날 마을 회관에서 마을 잔치를 연다.

마을 대동제이야기를 듣다보면 밥을 걸렀어도 배가 부르다.

김교일씨의 안내로 당숲과 당집을 답사한 뒤 평택으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 괜찮다는 내 손에, 김교일씨는 끝물에 딴 파지이기는 하지만 먹을 만하다며 오이를 담은 묵직한 봉지를 내민다.

못이기는 척 들고 오는 내 마음에 따스한 전류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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