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미 가족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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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해규 2004/9/5(일) | |
마을과 지명이야기 -오성면 죽리
![]() 오성면 죽리 1.죽리에는 대숲이 울창했을까? 죽리는 오성면의 경계다. 이 마을은 양교리와 경계인 1리 방울(미)마을에서부터 오성초등학교가 있는 5리 마을까지 무려 다섯 개 마을로 형성되었다. 다섯 마을의 중심은 3리 대죽동과 4리 소죽동 그리고 1리 방울이다. 세 마을은 생성시기도 비슷하고 가호 수도 엇비슷하다. 1리 방울은 방울미라고도 부른다. 본래 지명에서 ‘미’라는 말은 마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의미는 같다. 이 마을은 전체 가호 수가 40여 호로 연일 정씨가 대성(大姓)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각성바지다. 생업은 대부분이 농업으로 논농사와 밭농사가 반반을 이룬다. 요즘에는 근처에 생긴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2리는 신죽(新竹) 또는 진흥굴이라고 불린다. 지명에서는 일반적으로 신(新) 자가 들어간 마을은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후 이주민들이 이룩하여 4리 소죽(小竹)골에 속했었는데 1970년을 전후해서 분동(分洞)되었다. 그래서 마을 규모도 25호로 적은 편이고 주민구성도 각성바지다. 3리는 대죽(大竹)이다. 대죽(大竹)은 큰댓골로도 불린다. 이 마을도 농업이 주산업으로 약 35호쯤 된다. 대성(大姓)은 한양 조씨로 전체 가호에서 약 15호를 차지한다. 소죽 또는 작은 댓골이라고 부르는 4리는 40여 호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고굼뱅이라고도 불렸다. 이 마을은 1백여 년 전만 해도 숙성리에서 안중 넘어가는 봉무들고개에 있었다. 하지만 행인들이 지나는 길목인데다 주막도 있어서 불량배들의 행패도 심했고, 도둑이나 강도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그래서 옮긴 곳이 현재의 마을이다. 마을의 대성은 한양 조씨이지만 파평 윤씨도 7, 8호쯤 된다. 얼마 전 평택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윤주학씨도 이 마을 출신의 파평 윤씨이다. 5리는 숙성1리와 도로를 경계로 마주보고 있다. 그래서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숙성리와 죽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성면사무소와 오성초등학교가 죽5리에 있다고 하면 금세 고개를 끄덕인다. 이 마을은 죽리와 숙성리에 나눠져 있던 것인데 1970년대 종자보급소가 생기면서 분동(分洞)되었다. 죽리라는 지명은 울창한 대숲을 연상시킨다. 죽(竹) 자가 대숲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성의 죽산면에 대숲이 많지 않듯이 죽리(竹里)에서도 대숲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주민들에게 물어도 모르겠다고 한다. 더구나 평택은 대나무 생장의 북방한계선을 넘고 있어 유래가 아리송하다. 2.죽리마을의 새마을 운동 죽리는 이웃한 양교리와 함께 오봉산, 삼정승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산간마을이다. 마을 앞에 봉무들고개까지 있어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산업화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전원마을이었다. 경제기반도 신리, 창내리, 교포리처럼 오성들이 아니라 산골짜기에 형성된 일명 고라실논이 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3리 큰댓골 옆으로 서평택에서 안성 간 동서연결고속도로로 접속하는 간이 도로가 마을 옆을 지나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죽리 답사는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발효된 호우주의보가 해제되었던 금요일 오후에 시작하였다. 궁안교를 넘어서니 추수를 기다리며 고개를 깊숙이 숙인 이른 벼들이 눈에 띈다. 하루 전에 만났던 팽성읍 본정리 이장은 비가 그치면 서둘러 베어야 할 벼들이라고 하였다. 마을 입구에 다다랐더니 마침 구름 사이에서 해가 고개를 내민다. 서둘러 카메라를 꺼내들고 4리 소죽마을부터 사진을 찍었다. 마을 원경을 서너 장 찍은 뒤 마을에 들어섰더니 동네 어귀에 노인 두, 세 명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을 안에 경로당도 없다고 하기에 간략하게 마을의 내력을 물은 뒤 해가 구름에 가리기 전에 다른 마을 사진을 몇 장 찍고 10여 분 뒤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지나친 기대였다. 서둘러 1리 방울미, 3리 큰댓골, 4리 신죽 마을 사진을 찍은 뒤 부리나케 4리로 돌아왔더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한 사람도 없다. 허탈한 마음을 접고 큰댓골 경로당을 찾았지만 저녁 먹을 시간이어선지 여기서도 인터뷰 대상자를 만날 수 없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봉무들 고개로 나오는 중에 마당가에서 서성이던 윤복(68세, 큰댓골 거주)씨를 만났다. 윤복씨는 집을 수리하는 중이어서 안중 사는 아들네로 저녁을 먹으러 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염치불구하고 10분만 인터뷰를 하자고 붙들어 앉혔다. 윤복씨는 본관이 파평으로 본래 죽4리 작은댓골에서 3대를 살아온 분이었다. 그 전에는 11대조부터 청북면 옥길리에서 살았다고 했다. 작은댓골로 이거하면서 처음에는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면서 벼와 보리, 콩 등을 재배하였다. 그래도 마을에서는 중농 축에 속해서 한 때는 머슴을 두 명씩이나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33년 전 과수농사를 시작하였다. 본인의 기억으로는 오성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과수재배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축산업에도 손을 대었다. 재산도 불어나서 현재는 1만 5천평의 땅에 과수재배를 하고 있다. 이 분은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마을 이장으로 일한 적이 있어 주변 마을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았다. 특히 자신의 사회활동에서 새마을 사업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새마을 사업이 농촌의 발전과 농민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렇지요. 새마을 사업이 아니었다면 지붕이나 담장을 고치고, 마을길을 넓힐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새마을 사업이 일제 말에 실시한 ‘농촌진흥운동’의 복사판이고, 우리문화에서 남겨야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주도로 무분별하게 진행되었다는 문제점을 안고는 있지만, 농촌사회를 짧은 기간에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것만은 분명했다. 특히 농촌에서는 이장, 새마을 지도자, 청년회장,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밀어붙이기식 정책을 많이 수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이장의 역할이 가장 컸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들을 연수원에 불러모아 교육을 시키고, 마을마다 시멘트 1000대에서 1500포대를 지원하여 마을 안길 넓히기와 담장개량, 지붕개량 등을 추진하였다. ‘새벽종이 울렸네’라든가 ‘잘 살아 보세’와 같은 새마을 노래를 매일 아침마다 트는 것도 이장의 몫이었다. 험험 헛기침을 한 뒤 ‘한 말씀 드리것 습니다. 오늘은 작은 댓골에서 신죽까지 일을 할팅게 집집마다 한 사람씩 부역 나오세요’라고 알리기도 하였다. 당시는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이고, 정부 시책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절이어서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윤복씨는 새마을 사업 중 시멘트 1000포대를 지원받아 38번 국도에서 죽4리 작은 댓골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확장하고 시멘트 포장을 하였다. 그는 지금도 그 길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뿌듯하다고 하였다. 3.요즘 자기 땅 가진 사람 많지 않어! 일제 말 죽리의 교육사정은 썩 좋지 않았다. 당시 정규학교는 안중초등학교 뿐이었고, 오성면에는 숙성리 간이학교와 서병창씨가 운영했던 서일학원, 그리고 양교리 강습소가 있었다. 죽리 사람들은 가까운 양교리 강습소를 다니거나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안중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는 초등학교도 시험봐서 들어갔는데, 시험이라고 해봐야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지를 묻는 정도의 간단한 구술시험이었다. 윤복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는데, 줄 곧 안중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양교리 강습소는 이 마을 지식인 황욱재씨가 창립하였다. 규모도 제법 커서 교실과 운동장을 갖추었고, 학생 수도 150여 명에 달했다. 이 학교에는 윤주학씨의 부친이었던 윤정순씨도 교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해방 후 오성간이학교와 서일학원, 양교리 강습소가 통합되어 오성초등학교가 되었다. 간이학교나 강습소에 근무했던 교사들도 초등학교 교사로 흡수되었다. 오성초등학교는 한국전쟁 당시 크게 파괴되었다. 1.4후퇴를 하면서 인민군의 주둔지로 이용될까봐 미군이 방화를 한 것이다. 방화 후 학교는 현재의 터로 이전하였고 옛 터는 오성중학교가 되었다. 평택 전 지역이 그렇지만 오성면도 최근 땅 값이 크게 올랐다. 도심이 아닌데도 죽리 길 옆의 왠만한 땅들은 5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 토지 가격이 오르면 농민들은 큰 부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토지 가격이 인상될 듯 하면 부동산 업자들이나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의 투기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죽리, 길음리, 양교리 일대도 마찬가지였다. 농민들은 투기꾼들의 사탕발림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들을 팔아넘겼다. 그러고는 자신들이 팔아 넘긴 부재지주들의 땅을 빌려 소작을 짓고 있다.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들이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서글픈 현상이 우리 고장에서도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


글쓴이: 김해규
마을과 지명이야기 -오성면 죽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