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길음리에서내다본안성천
| |
아산만
방조제 건설전에는 물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숭어와
강다리 잡던 시절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 7년
전의 기억을 찾아서
7년 전에도 길음리를 찾았었다.
평택의 향토문화에 관심을 갖고 헤맨지 몇 년, 내가
지도하던 고적답사반 아이들과 탑고개, 내탑 같은 지명에 기대감을 갖고 조사활동을 한 것이다.
당시 길음리에는 내탑마을 못미쳐
경로당이 하나 있었다.
겨울 경로당에는 바둑과 고스톱을 치는 노인 몇 분이 앉아 우릴 맞았다.
우리는 문헌조사가
미흡했던 터라 무엇부터 질문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그런데도 노인들은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하여 우리를 감동하게
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7년 만에 다시 찾은 길음리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단지 변했다면 마을 뒤에
새도로가 났고, 주민들의 평균 나이가 조금 더 들었으며, 새롭게 단장한 주택들이 몇 집 늘었을 뿐이다.
팽성대교를 지나 강변을
따라 달리다가 길음리로 접어들었다.
장마철이기 때문인지 내탑마을 경로당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문을 몇 번
흔들다 차를 타고 원길음에서 내탑을 거쳐 미삐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마을 입구마다 남아 있는 4H 탑과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는
새마을 공판장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내탑마을 공판장은 7년 전에도 인터뷰를 마치고 맥주와 오징어를 샀던 기억이
나서 다시 한 번 쳐다봤다.
내탑마을을 지나 농로를 따라 미삐로 가다가 채소에 농약을 뿌리고 있는 김원규(73)씨 부부를 만났다.
김원규씨는 내가 한광여고 교사라고 하니까 자신의 딸이 우리학교 출신이라며 무척 반가워했다.
이 분의 따님은 서울의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말했는데, 나를 반가워 한 것은 결국 딸자랑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또 김원규씨는 김녕 김씨 충의공파로 나와 본관과 계파도 같았다.
남자들은 집안이야기, 학교이야기, 고향이야기,
군대이야기 중에서 한 가지만 같으면 강한 동질감과 친밀감을 갖게 되는데, 우리의 만남도 그와 비슷한 경우였다.
김원규씨에 따르면
평택지방의 김녕 김씨는 이웃한 대반리에 많이 산다고 하는데, 내가 조사한 바로는 고덕면 문곡리, 세교동은실마을에도 제법 많은 수가 거주하고
있다.
■ 질음리와 길음(吉音)리
길음리는 원길음(1리), 내탑(2리), 미삐(3리)로
구성되었다.
동쪽으로는 당거리와 이웃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대반리, 북쪽으로는 금곡리와 가까이 있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안성천 변에 양산말과 홍원마을이 있었지만 몇 십 년에 걸친 침식작용으로 폐동되어 없어졌다.
길음이라는 지명은
‘질음’에서 왔다. ‘질음’이라는 말은 ‘질퍽하다’의 줄임말인데, 우리나라 에는 이처럼 형용사로 된 자연지명들이 많다.
이 마을은
산등성이에 위치했지만 바다와 가깝고 주변에 습지대가 많아서 ‘질퍽질퍽한 동네’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지명으로 굳어졌다.
원길음은
모두 40여 호다. 마을은 조선 후기에 개척되었는데, 길게 잡아도 150년, 2백 년은 넘지 않는다.
내탑은 안탑골이라고도
부른다. 안탑이든 내탑이든 ‘탑고개 안쪽 마을’이라는 뜻에는 변함이 없다.
탑고개의 손바닥만한 탑이 크고 작은 두 개 마을의
지명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지배층도 없고, 특별한 특징도 없는 길음리, 당거리에서 큰무당이 섬기는
신성한 탑은 사람들의 관심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 마을도 40여 호로 원길음과 비슷한 규모이지만, 1973년 아산만 방조제 건설
후 외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주민들은 주변지역에서 온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충남 대천이나 공주에서 이주한
사람이 많다.
김원규씨에게 ‘길음리, 당거리는 오성면에서 가장 살기 힘든 동네인데 왜 이주했지요?’하고 물았더니, ‘간척할 때
이곳 땅 값이 다른 곳보다 3배는 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미삐는 미촌이라고 부른다. 동네에서는 그냥 미삐라고 부르지만
대외용으로는 ‘미촌(美村)’이라고 소개한다.
그것은 ‘질음’을 ‘길음(吉音)’으로 바꿔 놓고 ‘닭(금계)이 큰 울음을 우는
형국’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삐는 35호로 규모는 조금 작지만 마을 규모는 원길음이나 내탑보다 크다.
마을의 역사는 토착 성씨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김원규씨네가 5대조 때 입향했다는 것으로 봐서 대략 150년, 200년으로
추정된다.
양산말은 ‘갯고랑’으로 불렸던 마을로 조선시대 옛 양성현 땅이다. 길음리와 당거리, 숙성리는 조선후기 수원부, 양성현,
직산현 땅이 혼재되었던 지역인데, 양산말은 양성현에 속했다.
일반적으로 행정구역이 중첩된 지역에는 행정 명이 지명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
구 평택시 유천동의 양성유천이나 안중면 대반리의 직산말이 대표적이다.
이 마을도 본래는 양성현 땅이라는
뜻에서 ‘양성말’로 불렸던 것이 나중에 음이 변하면서 ‘양산말’로 불렸었다.
함께 수몰된 홍원마을은 직산현 언북면 땅이었다.
원(院)이란 ‘간척된 땅’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곳은 큰 간척지였기 때문에 ‘넓은 들’로 부르다가 넓을 홍(洪)자를
써서 홍원(洪院)이라고 하였다.
■ 숭어가 펄떡펄떡 뛰는 것 봤어!
길음리의 생업은 농업이다.
하지만 아산만 방조제가 막히기 전만 해도 20% 쯤은 어업에 종사했다.
이곳의 농경지는 마을 서남쪽 ‘양산말들’과 남쪽
‘도두리들’ 그리고 북쪽의 구릉지대였다.
도두리들은 일제 말까지만 해도 안성천 북쪽마을 땅이었고 부분적 간척이 있었지만 대부분
갯벌(간석지)이어서 생산력이 낮았고, 농경이 가능한 땅은 양산말들과 북쪽 구릉지대였다.
하지만 농경지의 대부분은 평택 사는
민병호씨 형제가 다 차지했고, 일제말에 개간된 길본농장의 소유주도 일본인이었다.
김원규씨 말로는 민병호씨와 길본농장 말고는
내탑마을 한씨네만 유일한 자작농이었다고 한다.
해방 전후 길음리의 농경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전에 내가 이 마을을 소개할 때도
‘과거 안성천 변에서 가장 가난했던 마을’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이 그러했다.
이 마을의 가난은 ‘농지를 농민들이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농조건이 가장 열악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길음리의 농경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수해나 염해가 아니라
농업용수였다.
아산만 방조제 건설 전에는 드러난 갯가였고, 작은 하천을 따라서 내륙 깊숙이 조수가 밀려들어 물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서 하늘만 바라보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윗동네 금곡리에서 논물을 대고 남은 것으로 모를 심었고, 하도 가물어
모판에서 모를 쪄내도 흙덩이리가 주렁주렁 달려서 물에다 털어 심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지하수까지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양산말들에는 7월달이 되어도 모내기를 못한 논이 수두룩하였고, 관청에서는 건답지모, 호미모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영농조건에서 살림살이가 좋을리 없었다. 7년 전에 인터뷰한 김완규(당시 74세), 박종훈(당시 85세)씨는 ‘삼년에 한
번 수확하면 잘한 거고 수확해도 쭉정이 뿐이어서 동네에서 하루 세끼 먹으면 부자 소리들었다’고 말했다.
어업은 수몰된 양산말
사람들이 많이 했다. 미삐에도 5, 6집 있었고, 홍원마을 사람들도 몇 집 하였지만 대부분 양산말 사람들이었다.
김완규씨는
양산말에서 평생 어업과 거간으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아산만의 어업은 수종은 많지 않았지만 숭어, 강다리, 꽃게 등이 많이 잡혀
삼남의 어선들이 몰려들었다.
김완규씨는 주로 숭어와 강다리를 잡았는데, 바다에 나가면 물반 고기 반이어서 어획량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판로가 문제였다. 지금처럼 수족관이나 냉동시설이 있었을리 만무한 그 시절에 잡은 고기를 제 때 팔지 못하면 햇볕에 말리거나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애써 잡은 고기를 보리나 잡곡과 바꾸거나 거져 나눠주고 추수 때 곡식으로 받기도 했다.
그것도 주는 대로 받았기 때문에 어민들의 삶도 농민들만큼 고달팠다.
길음리는 해방 후 두 번의 큰 변화를 겪었다.
농지개혁과 아산만 방조제 건설이다.
1950년 농지개혁은 전쟁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방식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였고 7년 현물상환이었지만, 흉년이나 재해가 발생하면 상환기일을 연장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보다 길었다.
김원규씨나
박종훈씨는 이 박사(이승만)가 한 일 중에는 그 중 나은 일이었다며, 이 개혁으로 만년 소작농들이 자기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농지개혁이 자기 땅을 갖게 했다면 1973년 아산만 방조제 건설은 만년 가난에 찌들었던 길음리 민중들을 잘 살게 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으로 침식작용으로 폐동 위기에 몰렸던 마을들이 살아났으며, 양산만들과 홍원마을 자리가 간척되어 농경지로 변모하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