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면 신리

오성면 신리
궁안교 넘어 오성면 첫 동네 광활한 갯벌이 펼쳐진 천형의 땅

평택시민신문

▲ 신리 삼동촌
일제 강점기엔
일본인 소유 농장
해방 후엔
미군정 적산 농지

한국전쟁 직후
개간 시작
천지개벽
아산만 방조제
완공되자 팔자 고쳐


■ 신리, 신리사람들

신리는 궁안교 넘어 오성면의 첫 동네다.

고덕면의 궁리 다루지마을과 함께 지긋지긋할 만큼 물난리를 많이 겪은 이 마을은 삼궁원(1리), 새터(2리), 삼동촌(3리), 중다리(4리)로 구성되었다.

마을들은 대부분 각성바지고 가호 수는 근래 연립주택이 건립되면서 인구가 증가한 삼궁원이 133세대, 새터가 60여 세대, 삼동촌이 25세대, 중다리(중대)가 60여 세대다.

이곳의 지명은 2리 새터에서 왔다.

새터는 새말, 신대, 신흥으로도 불려지지만, 행정 명으로는 신리로 쓰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을 봐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 지역에는 새터와 중다리(대) 뿐이었다.

삼동촌은 본래 뱃터였다.

오성들을 간척하기 전 진위천의 물길은 삼동촌과 원창내, 고덕면 동고리를 휘감아 돌았는데, 이 시절 동고리 아래소청나루에서 건너온 나룻배가 삼동촌에 닿았다.

나루에는 주막이나 객주 한 두 집 뿐 큰 마을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 상례다.

하천 변에 발달한 작은 나루에서의 상업활동으로는 대규모 마을을 먹여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삼동촌에도 뱃터 부근에 두어 집이 있었다.

삼동촌이라는 지명도 세 집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어서 이 당시 마을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삼궁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마을이다. 이곳에는 본래 배다리가 있어서 주교포(舟橋浦)로 불렸다.

옛날 삼동촌에서 내린 사람들은 삼궁원 배다리를 건너야 숙성리로 갈 수 있었다.

혹자는 지명에 ‘궁(宮)’자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궁궐같이 큰 집 세 채가 있었다’는 맹랑한 주장을 하지만 그것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어느 바보가 갯벌이 질척거리는 황무지에 궁궐 같은 큰 집을 지어 놓겠는가.

그보다는 조선 말기 궁토(宮土)였던 시절에 오성들에는 궁궐 소유의 간척지(원)가 세 곳이 있었는데, 이 마을이 세 번 째 궁원, 즉 ‘삼궁원’이었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이곳은 100여 년 전만 해도 거의 마을이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벌판도 그냥 허허벌판이 아니고 조수가 내륙 깊숙이 밀려들고 광활한 갯벌이 펼쳐진 천형의 땅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식수는 물론이고 허드렛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원창내와 삼동촌을 휘감아 도는 진위천은 간만의 차가 최고 9미터에 달해 조수가 한 번 드나들면 거친 물살에 토지가 1, 2미터 쯤 잘려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금도 마을 노인들이 신리, 창내리, 교포리는 천지개벽 때 생겼다고 말하는 것도 오성들의 지형적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천형의 땅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다.

생산력이 향상되면서 국가나 궁궐 그리고 일제가 간석지의 개간에 눈을 돌리자, 개간된 농토에 기대 살려는 가난한 민중들이 모여든 것이다.

이들은 고향에서조차 뿌리가 흔들려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거나, 국가와 지배층의 수탈에 각 지역을 떠돌던 유민들이었다.

인터뷰에 응한 삼궁원의 정교훈(66세)씨도 조부가 고덕면 궁리 건군이 마을에 살다 일제 때 이주한 분이었고, 신종구(67세)씨나 남상옥(70세)씨도 고향을 떠나 각 지방을 떠돌다 몇 십 년 전에 정착한 분들이었다.


■ 일정 때는 죄다 일본 놈들 땅이었지

일제강점기 신리는 고행의 땅이었다.

그 시절 도(道)를 얻으려는 수행자가 있었다면 신리가 적당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곳은 조선후기 대부분의 지역이 궁방전이나 둔토(屯土)였고, 일제강점기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토지였다.

마을의 토지를 대부분 점유한 지주는 일본인 소유의 평원농장이었다.

평원농장은 궁안교 건너 궁리부터 삼궁원 부근의 토지를 대부분 점유했던 대형농장이었다.

일본인 농장은 평원농장 외에도 창신초등학교 가는 길 양쪽에 두 개가 더 있었고, 안화리 쪽에는 동척농장도 있었다.

일본인 농장들은 사무실을 두고 조선인 마름과 사무원을 고용하여 농장경영을 하였다.

말과 풍속이 다른 일본인보다 충성스런(?) 조선인들이 지주의 토지경영에는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주민들은 새 삶의 꿈을 안고 찾아왔지만 이곳마저 그들에게 돌아갈 땅은 없었다.

이주민들은 일본인 지주나 마름들에게 굽신거리며 농토를 구걸해야만 했다.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체면이나 자존심은 내다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정교훈씨의 조부도 평원농장의 마름이었던 이모 씨에게 소작지를 받아 정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 번 소작을 받았다고 모든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작료야 계약서대로 받았지만, 마름이 악질일수록 부가적으로 상납 받는 것이 많았다.

그렇다고 마름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저항하면 소작권을 빼앗겼다.

소작권의 상실은 생존권의 박탈을 의미했다. 농장 사무실 사무원의 횡포도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일제와 지배층에 저항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의 신문에 오성들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보도되지 않는 것이 그 근거다.

생존권의 절박감 때문인지, 아니면 직업적 활동가가 없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해방 후 오성들의 적산농지는 미군정이 만든 신한공사로 귀속되었다.

개간사업도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원주민을 동원하여 개간이 시작되었다.

기아에 허덕이는 국민들을 먹여 살릴 생각으로 정부가 추진한 사업이었다.

관청에서 집집마다 부역 나올 인원을 배당하면 사람들은 지게나 가래를 들고 일을 나갔다.

변변한 도구도 없이 거의 맨주먹으로 하는 개간 작업은 고되기 이를 데 없었다.

보리고개가 다가오면 주린 배를 채우지도 못하고 일을 하였다. 그렇지만 희망은 있었다.

농지가 개간되면 부역 나온 농민들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개간은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아산만 방조제 건설이 완공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개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노인정에 모였던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불하받았는데 땅주인이 나타났을 때였다고 말했다.

갯가에 말뚝을 박아 놓은 봉이 김선달 같은 인물은 일제강점기 오성면장을 지냈던 서모씨와 같은 사람이었다.

결국 진위천 부지는 땅주인에게 돌아가고, 나머지는 농민들에게 불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 물 많은 동네에서 물 때문에 고생하다

신리는 물이 많은 동네다.

진위천은 어지간한 강(江)보다 수량이 많아서 배후 습지도 넓게 형성되었다.

광활한 들판에 수량이 넉넉한 하천은 금실 좋은 부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모습일 뿐 과거를 대변하지는 못한다.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의 오성들은 ‘물 많은 곳에서 물 때문에 지지리도 고생하던 동네였다.

물의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식수난이다.

신리는 오성면에서도 식수를 얻기가 가장 어려운 동네로 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삼궁원을 제외한 삼동촌, 중다리, 새터는 땅을 파면 짠물이 콸콸 나와 허드렛물도 구하기 어려웠던 동네로 꼽혔다.

삼궁원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파 놓은 우물이 있어 식수난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안성천, 진위천 변의 마을들은 웅덩이에서 식수를 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삼동촌이나 새터, 중다리 마을들은 웅덩이물과 함께 안화리 부근의 보(洑)에서 물을 끌어다 농업용수와 식수를 해결하였다.

하지만 안화리까지는 무려 4㎞가 넘는 먼 길이었다.

그래도 농사짓고 살기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먼 길에 도랑을 파고 물을 끌어들였다.

그런 뒤 다시 보(洑)를 만들어 그 물을 가둬두었다가 용도에 따라 사용하였다.

요즘은 비닐공해로 몸살을 앓지만 1970년대 비닐호스의 등장은 이들의 어깨를 한결 가볍게 하는 기술적 진보였다.

오성들 뿐 아니라 해창들, 구동안들에 물을 댔던 ‘오성보’는 한국전쟁 후에 건설되었다.

전쟁 후 5년 동안 진저리처질만큼 오랜 가뭄이 들자 정부가 농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것이 오성보였다.

오성보의 건설에는 토지소유에 따라 1정보에 7명씩 할당되었다.

품삯은 처음에는 구호물자를 타 먹을 수 있는 ‘맘보’를 주었다가 나중에는 담배로 지급하였다.

담배품삯은 샛별이나 공작과 같은 담배를 지게로 한 번 져서 나를 때마다 3, 4개피 씩 주었다.

담배는 품삯이었기 때문에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공사장 주변에는 일꾼들을 상대로 밥과 술을 파는 주막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담배를 받고 술도 주고 밥도 팔았으며, 때로는 곡식으로도 바꿔주었다.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었어도 해마다 반복되는 수해와 염해는 막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둑을 쌓았고, 해방 후에도 두 세 차례 쌓아 올렸지만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농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해결해 준 것은 국가였다.

경제성장을 위해 저임금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량증산과 저곡가 정책이 필요했던 국가는 1973년 안성천 하류에 방조제를 건설하여 바닷물의 유입을 사전에 차단하고 풍부하고 안정되게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들은 이 사건을 ‘천지개벽’에 비유하였다.

박복한 년 팔자 고친 사건으로도 이야기 했다.

그만큼 이들의 고통은 질기고 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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