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면 창내리

오성면 창내리
어디를 가도 들들들 판판판 오성들은 평택의 대표적인 간척지

평택시민신문

▲ 창내1리 원창내
간척사업때
개척단으로
이주해 온
주민들


이제는
재산과 살림도
늘어나고
허허 웃음소리 가득


■ 황무지 위의 엘도라도

오월의 초입 오성들은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어디를 가도 들들들 판판판 뿐인 이곳에서 논갈이를 위해 트랙터를 모는 풍경은 흔하다.

트랙터 뒤에는 요란한 기계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백로, 도요새, 박새가 졸졸 따라다닌다.

길을 지나던 나이 먹은 농부는 지난 가뭄으로 성장이 더딘 못자리를 걱정하고, 70세가 다 된 트랙터 운전수는 잠시 기계를 멈추고 올 농사를 걱정하며 한담을 나눈다.

그 사이를 내가 끼어 들며 ‘농사일에 바쁘시죠?’라고 말을 건냈다. 그랬더니 낮을 가리지도 않고 ‘아직 멀었어, 한 두 주는 더 있어야지’라고 말한다.

오성들은 평택지방의 대표적인 간척지다.

이곳말고도 도두리들, 동고리들, 소사벌, 번개들, 평궁리들과 같은 큰 벌판이 있지만 규모가 오성들만 못하다.

이 곳의 간척은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었다.

지명에 ‘궁(宮)’자가 들어가는 것이 그 증거다. ‘궁(宮)’은 궁궐(宮闕)이나 운현궁처럼 왕족들의 거처를 말한다.

이곳이 ‘궁토(宮土)가 된 것은 조선후기 국가의 재정상태와 관련 있다.

예컨대 조선은 양난 이후 토지의 황폐화와 인구의 감소, 양안의 소실로 수세지(收稅地)가 급격히 감소하자 직전법 체제 하에서 궁(宮)에 지급하던 수조지(收租地)의 지급을 중단하였다.

대신 광범위한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여 재정기반으로 삼도록 조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안성천이나 진위천 변과 같은 저습지나 간석지의 대규모 개간이 시작되었고 개간된 땅에는 ‘궁(宮)’이 들어간 지명이 나타났다.

그러면 조선 후기 이후 대규모 개간이 있기 전에는 어땠을까.

그 전에도 사람은 살았을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 전에도 사람이 살았다. 하지만 이전의 오성들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았고, 농업용수와 식수를 얻기가 아주 어려운 척박한 땅이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기 전 인구밀도가 낮고 생산물이 적은 지역을 다스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국가나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영양가 없는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전 이런 지역은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다스렸다. ‘장(莊)’이나 ‘처(處)’, ‘향(鄕 이나 ’부곡(部曲)‘이 그것이다.

오성들 주변의 신리나 창내리, 교포리 지역은 고려시대 ’오타장‘이었다. 남쪽 어디에는 ’천장부곡‘이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의 민중들은 수해와 염해, 갯골과 싸우면서 소규모 간척과 어업과 수산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이런 지역에는 ’원‘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길마원’, ‘삼궁원’같은 지명이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의 주민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이탈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성경에서 ’암 하 아레츠‘라고 하는 땅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래서 숙성리나 양교리 같이 산을 끼고 좋은 농경지를 소유했던 사람들은 이 마을 주민들을 ‘들놈들’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수모와 천대를 받으며 몇 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 궁토(宮土)가 일본인 농장으로

오성면은 본래 금곡리, 대반리, 삼정리로 대표되는 ‘오정면’과 숙성리, 죽리, 양교리에 있었던 숙성면이 진위군 고두면의 일부지역과 직산군 승량면의 일부지역을 통합하면서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면서 ‘산 쪽 양반들’과 ‘들놈들’이 하나가 된 것이다.

오성들의 개벽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후 그리고 1970년대에 왔다.

일제가 1899년에 제작한 평택지방 지도를 보면 오성들은 절반 이상이 간석지였고, 소규모 농경지 사이로는 갯골이 흘렀다.

이와 같은 모습은 신리 삼궁원 마을의 다른 이름이 주교리(舟橋里)였고, 교포리가 ‘다릿개’, 월랑촌이 ‘똘건너’로 불렸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땅조차 가난한 민중들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궁(宮)에 부여한 간석지의 개간권은 오성들의 농경지를 대부분 앗아갔다.

구한국 시대에 작성된 ‘명례방 추수기’나 각종 둔토(屯土)의 성책을 살펴보면 이 지역의 토지들은 대부분 궁궐이나 국가소유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토지에 관한 모든 권한이 궁궐이나 군대, 관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토지관계라는 것이 경작자에게도 일정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국유지정리상업과 역둔토관리규정을 만들어 이들 토지를 강탈하면서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모든 권한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이 토지를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통하여 일본인에게 불하하였다.

궁토와 역둔토가 일본인 농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창내리와 신리 일대에는 평원농장이라는 일본인 농장이 들어섰다.

창신초등학교로 가는 도로변에도 일본인 농장이 두 개 더 있었고, 안화리에는 동척농장도 있었다.

일본인 농장들은 조선인 마름과 농장사무실을 두고 토지를 경영하였다.

이들은 근대적 지주-소작관계를 체결한다고 1년 단위의 소작권 갱신을 요구하였고 툭하면 소작권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하였다.

같은 마을에 살던 이모씨, 임모씨 같은 악질 마름의 횡포는 농민들의 원성과 분노를 샀다.

일본인들은 우세한 자금력과 인력동원능력을 배경으로 경작지도 넓혀갔다.

오성들의 대규모 개간이 확대된 것도 이 시기였다.

개간으로 숙성리의 오성장로교회 앞까지 들어갔던 바닷물도 소조두, 대조두를 넘어서기 힘들게 되었고, 교포리, 창내리의 갯벌에도 제방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신리의 정교훈(66세)씨에 따르면 일제 말에 개간을 맡은 회사는 임전조선농장개량(주)였다고 한다.

이 시기는 태평양전쟁으로 식량의 강제공출과 생산량 확대를 독려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힘겨운 세상을 묵묵히 이겨내다 보니 해방이 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일제의 지배와 수탈이 한순간에 중단된 것이다.


■ 똥창내에 꽃이 피다

창내리는 원창내(1리), 구창내(2리), 신창내(3리), 동창리(4리)로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 원창내는 24호, 구창내는 60호, 신창내는 50호, 동창리는 48호이다.

마을들은 간척이 진행됨에 따라 원창내, 구창내, 신창내, 동창리가 차례로 형성되었다.

그러다 보니 성씨도 각성바지뿐이다.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작성된 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의하면, 1914년 당시 창내리가 형성될 때 이 지역에는 원창내 한 마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에 의한 간척이 진행되면서 구창내와 신창내 마을이 형성되었고, 1990년에는 창내4리 동창마을이 원창내에서 분동되었다.

동창리(東倉里)라는 지명은 분동 당시 주민들이 창내리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점에 착안하여 지었다고 한다.

1970년대 이전 창내리는 똥창내라고 불렸다. ‘똥’이라는 글자는 ‘더럽다’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나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만큼 창내리는 뿌리가 약한 사람들의 마을이었고, 사람살기 나쁜 땅이었다.

이런 불명예의 역사는 수 백년 이상 지속된 것이지만, 짧게는 1950, 60년대에 피난민과 이주민들에 의해 진행된 간척사업이 한 못 하였다.

특히 1960년대 초에 시작된 간척사업 때 몰려든 사람들은 ‘개척단’이라고 불렸다.

구창내 앞 논뚝길에서 만난 장길호(61세)씨도 이 시기에 이주한 분이었다.

장길호씨는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1961년에 이주하였다고 했다.

이주 동기를 물었더니, 이 지역의 땅은 대규모 간척으로 대전보다 3, 4배나 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주민의 삶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먼저 정착한 원주민들의 텃세도 만만치 않았다. 마을 앞까지 밀려오는 바닷물도 위협적이었지만, 식수와 농업용수를 구할 수 없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모내기철을 넘겨 건답지모, 호미모를 심는 경우도 많았고, 그것도 안되면 메밀을 심는 경우도 있었다.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 농업용수와 식수는 4, 5㎞나 떨어진 궁안교 아래에 보를 막아서 해결하였다.

이 보는 늦가을에 쌓았다가 물난리 때문에 이듬해 터트리는 1년짜리 간이보였다.

그렇게 힘들여 농사를 짖고, 결혼하여 4남매를 키우고, 1만 8천 평이나 되는 농경지를 일구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 때는 새마을지도자로 봉사도 하였다.

재산과 살림은 늘어났지만 버스를 타려면 4㎞나 떨어진 신리 삼궁원 마을까지 가야 하는 번거로움도, 아이들이 시오리길을 걸어 학교 다니는 불편함도, 1980년대 초에 버스가 들어오고, 1967년 오성벌을 메워 창신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깨끗이 해결되었다.

더구나 1973년 아산만 방조제 준공으로 지긋지긋하던 물난리도 해결되었다.

같은 시기에 진행된 경지정리사업과 안성천 제방공사는 팽성읍 쪽에 붙어 있던 간석지와 하천부지를 창내리 쪽으로 돌려놓는 부수입(?)도 얻게 하였다.

자리를 뜨며 ‘못 이룬 소원이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장길호씨는 ‘막내 장가보내 손주 보는 것’이라며 허허 웃었다. 똥창내에 꽃이 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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