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년 전,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출간 1년
만에 판매량 300만부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이 책을 통해 이슈가 된 인물이 두 명 있었으니 한 명은 작가 ‘김진명’이요,
다른 한 명은 소설 속 이용후의 실제인물 ‘이휘소’박사다. 소설의 첫머리에 ‘이휘소 박사와 조국을 위해 희생한 모든 분들께 이
책을 바친다’라고 적어놓은 작가의 한마디는 역사 속에 묻혀있던 이름 ‘이휘소’를 당시 최고의 화제어로 만들었다.
그러나
언론에서 이휘소의 연구업적을 소개할 때면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다. 소설을 통해 유명해진 인물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가
아닌, 다리뼈에 핵무기 개발의 원리가 적힌 필름을 숨겨올 정도의 ‘대단한 애국자 이휘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저승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 세계가 ‘제2의 아인슈타인’으로 평가하는 자신의 업적을 정작 한국에선 주목받지 못하는 현실이 얼마나 답답할까?
예정된 노벨상 수상자
이휘소는 1952년
서울대 화공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17세. 입학 후 그는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희망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1954년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물리학을 시작한지 6년 만에 그는 박사가 되었다. 역대 미 박사학위 평가시험 사상 최고점수까지
기록했으니 이쯤 되면 천재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25세 때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고 1977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스토니브룩(뉴욕 주립대)교수, 페르미국립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 시카고대학의 교수 등 학자와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이휘소 박사가 연구한 ‘재규격(renormalization)화 이론’은 지금까지 이론 물리학도들의 정통적인 연구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참입자의 탐색(Search for Charm)’같은 현상론적 논문도 실험물리 학자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고 있다.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살람박사는 수상소감에서 “벤자민 리(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가 있어서
부끄럽습니다” 라고 말하며 이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1분간 묵념의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199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벨트만과 토호프의 연구 역시 이휘소 박사의 ‘재규격화 이론’을 기반으로 했다. 이휘소 박사가 생전에 발표한 140여 편의 논문들은
세계적인 석학들의 연구에 활발하게 인용되고 있다.
보통사람 이휘소 
42년이라는 짧은 생애동안 내놓은 수많은 연구 성과를 낼 정도로 빡빡한
삶을 살아온 이휘소에게 인간미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질문이 민망할 정도로 그는 효자였고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며 인자한
스승이었다.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한 1954년부터 그는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로 꼬박꼬박 자신의 안부를 전하곤 했다.
편지에는 교정에서 키스하는 남녀를 보고 느낀 충격, 여자친구와의 데이트처럼 사소한 일까지 담고 있다. 편지는 항상
‘사랑하는’ 혹은 ‘with love’와 같은 단어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끝맺는다.
이휘소 박사는
유학생활을 시작한지 8년 만에 중국계 싱가폴 출신의 마리안느와 결혼했다. 그는 연애시절 일기에 마리안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마리안느, 내가 의지할 사랑, 나는 그녀의 헌신에 늘 고마워하고 있다. 한국인이 아니라서 좀
섭섭하지만……. - 1962년 5월 14일 -
이휘소 박사는 아내 마리안느, 아들 죠프리와 딸 아이윈까지
네 가족의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노력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던 날에도 그는 연구차 떠나는 출장길을 가족들의
즐거운 여행으로 만들기 위해 손수 운전대를 잡았었다.
스토니브룩에서 이휘소 박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고려대학교 강주상 교수는
그를 모범적이고 사려 깊은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강 교수는 이휘소 박사가 명료한 물리학 강의로 학생들에게 유명했고 교수평가에서
우수한 교육자로 선출되곤 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어려운 문제들을 물어보기에 거리감이 없었고 항상 해박한 지식과 인내심으로
설명해 주셨다”고 그는 덧붙인다.
벤자민 리
이휘소 박사의 미국이름은 벤자민 리다. 외국인
신분으로는 중요한 연구에 참여할 수 없어 1970년 미국으로 귀화했다. 새로운 지식을 향한 학자적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국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외국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직접 한국어를 가르쳤고 함께 한국전시회를 보러 다녔다. 친분이 있는
한국인들과 모여 유신체제 아래 조국의 상황을 걱정하기도 했다. 조국에 대한 걱정은 단지 생각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소설에서처럼
조국을 위해 핵무기를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1974년 서울대가 AID(국제개발처)차관을 유치할 수 있게 돕는 등 정치적인 의도에서
벗어난 영역에 대해서는 한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휘소 박사의 연구업적이나
인간됨을 흥미롭게 읽어 내려온 당신은 아마 여전히 두 가지 물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한반도 핵무기개발 프로젝트에
기여했느냐?"
"그의 죽음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느냐?“
“벤자민 리는 소설과는 달리 핵무기 제조자가 아닌 순수 이론
물리학자였습니다.” 이휘소 박사가 스토니브룩 재직시절 학교 총장이었던 마버거 박사가 지난 2월 방한기념 기자회견장에서 한 말이다.
미망인 마리안느 여사가 고려대 도서관에 기증한 이박사의 유품에서도 그가 한국 정부와 접촉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다. 지난 94년에는 이휘소 박사의 유가족들이 이 박사를 픽션화한 작품 <핵물리학자이휘소>, <소설이휘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에 대해 소송을 걸어 이휘소 박사가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었다는 내용을 소설에서 삭제토록 하는 판결을
받아냈다.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를 두고 언론에서는 음모설을 제기한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
시속 120킬로미터로 질주하던 운전자가 반대편에서 비슷한 속도로 달려오던 트럭에서 떨어져 나온 앞바퀴에 뇌를 강타당해 숨질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누군가 이 박사를 고의적으로 죽이려 했다면 좀더 성공 가능성이 높은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올해 4월에 출간된
고은의 시집 ‘만인보’에서 이휘소 박사는 아직도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 그가 사망한지도 벌써 27년이다. 우리는 이제 그만 그를
소설 밖으로 꺼내주어야 하지 않을까?
박근영 수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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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상 교수가 언급한 내용은 그의 추천에 따라 「물리학과 첨단기술(1999년12월호)」에 기고한 내용을 인용.
[ 출처 :
20대 감성의 시사웹진DEW ( http://www.ewhadew.com/ ) 2004.6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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